오피니언
[김준형의 클담42] 국립오페라단,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에서… ‘피터 그라임스’
김준형의 '클래식이 자라는 담벼락' Vol.42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피터 그라임스>가 마침내 국내 단체의 제작 무대로서는 처음으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랐다. 1979년 콜린 데이비스가 이끄는 로열 오페라단 내한 이후 무려 47년 만의 만남이다. 지휘자 알렉산더 조엘과 연출가 줄리앙 샤바를 필두로 한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팀, 그리고 세계적인 헬덴 테너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의 가세는 막이 오르기 전부터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20세기 영국의 외딴 어촌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집단적 광기와 소외를 다룬다는 점에서 늘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수작임에도 이제야 우리의 힘으로 무대에 올린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그래서 더 반갑다. 국립단체로서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행보로 환영하며, 이러한 움직임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연출가 줄리앙 샤바와 무대 디자이너 앰버 판덴훅은 현실의 무게와 신화의 끌림이라는 두 세계의 경계를 무대 위에 구현하고자 했다.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회전무대와 선박 세트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소금기와 시간에 의해 닳아버린 녹슨 파편들은 그 자체로 생존과 침식의 세월을 웅변했다.
이 부서진 선박은 각도에 따라 선술집과 오두막으로 변모하며 마을이자 바다, 나아가 그라임스의 불안한 내면을 대변했다. 영상 대신 인물의 움직임과 조명(엘로이 지아니니)에 집중한 연출은 사회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냉혹한 리얼리즘으로 포착해 냈다. 다만, 관현악 간주곡과 맞물려 무대를 환상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려 한 몇몇 상징적인 움직임이나 인형탈의 활용 등은, 현실의 팽팽한 극적 긴장감 속에서 관객에 따라 다소 낯설게 다가올 여지가 있었다. 연출가의 의도가 얼마나 매끄럽게 조율되고 수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남은 과제가 있어 보인다.
음악의 중심에 있는 알렉산더 조엘은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로 브리튼이 악보에 심어놓은 '차가운 서정성'과 심리적 디테일을 정교하게 재현했다. 국립심포니의 관현악 사운드는 입체적이며 영화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품의 백미인 간주곡은 단순한 막간 음악을 넘어 주인공의 내면을 밀도 있게 투영하여 극적 긴장을 높였다.
'새벽'이 품은 서늘한 적막감과 '폭풍'의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레이션은 그라임스를 둘러싼 내외적 갈등을 단숨에 시각화했다. '일요일 아침'의 뒤틀린 박자는 공동체의 위선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뤘고, 비극의 파국을 앞둔 '달빛'의 시린 울림 역시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켰다.
제2막 1장과 2장 사이에 흐르는 '파사칼리아'에서 첼로가 제시한 베이스 주제 위로 비올라 솔로의 애달픈 선율이 얹히고, 이어서 팀파니와 금관이 폭발적인 텍스처를 구축하는 과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라임스의 숨통을 압박했다. 근래 보기 드문 관현악의 비르투오시티였다.
성악진에서는 테너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의 중량감이 단연 돋보였다. 바그너 <파르지팔> 등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친숙한 베테랑답게, 그는 보컬과 연기 모두에서, 경계에 선 인간의 고독을 노련하게 포착해 냈다. 1막에서 별자리를 노래하는 "Now the Great Bear and Pleiades" 독백에서 보여준 깊은 침묵과 소외감은 객석을 압도했고, 3막 광란의 장면에서 파편화된 선율을 읊조리며 무너져 가는 모습은 존재감을 뚜렷이 각인시켰다.
여기에 엘렌 오포드 역의 소프라노 문수진은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서정적 보컬로 극의 균형을 잡았으며, 바리톤 양준모는 묵직하고 신뢰감 있는 음색으로 방관과 타협 사이에서 갈등하는 볼스트로드 선장의 심리를 안정적으로 받쳐주었다.
다만 이 작품의 구조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와의 대립 구도를 완성하는 과정에서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지휘자와 연출가의 의도대로 합창단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배경이자 바다와 같은 힘으로 또 하나의 주역이어야 했다.
이번 국립오페라스튜디오합창단과 위너오페라합창단은 뜨거운 에너지가 분출되는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그러나 브리튼이 요구한 군중 장면 특유의 매섭고도 촘촘한 리듬의 결을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완벽히 밀착시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극적 긴장감을 더 팽팽하게 유지해야 할 일부 총주 대목에서 음량 밸런스나 앙상블의 정교함이 긴밀하게 맞물리지 못해, 주역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비해 공동체가 가하는 집단적 압박감이 다소 무디게 다가온 면이 있다.
이 작품이 지닌 음악적·구조적 난이도를 감안할 때, 강력한 주역과 대규모 군중이 무대 위에서 완벽한 대립의 밸런스를 이루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오페라단의 이번 <피터 그라임스>는 국내 단체 제작 초연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 오페라 레퍼토리의 외연을 한 단계 확장했다는 뚜렷한 의의를 지닌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준형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에서 SAC’s choice 코너를 3년간 연재했으며, 객석, 피아노 음악,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월간 오디오 등 음악 관련 매체들에 오랫동안 칼럼을 기고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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