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피지컬 AI’에 베팅…AI 전쟁의 무대가 현실로 옮겨간다
- 엔닷라이트에 세 번째 후속 투자…150억원 투자 라운드 참여, 로봇·자율주행 시대 ‘데이터 인프라’ 선점
[시사매거진 = 주성진 기자] 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 무대가 화면 속에서 현실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AI 경쟁이 이제 로봇과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 물류자동화 등 실제 공간에서 움직이는 ‘피지컬 AI(Physical AI)’로 확장되면서다.
네이버가 이 시장에 다시 한번 베팅했다. 네이버의 스타트업 투자 조직 D2SF는 11일 피지컬 AI 데이터 인프라 기업 엔닷라이트에 세 번째 후속 투자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이번 투자 라운드는 산업은행이 주도했으며 전체 투자 규모는 150억원이다. 네이버 D2SF는 2021년 프리시리즈A와 2022년 시리즈A에 이어 이번에도 후속 투자에 참여했다.
이번 투자의 핵심은 ‘AI 모델’이 아니라 AI가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데이터다.
엔닷라이트는 자체 엔진을 기반으로 피지컬 AI 학습 시뮬레이션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레디(Simulation-Ready)’ 3D 데이터 생성 솔루션 ‘트리닉스(TRINIX)’를 개발하고 있다.
피지컬 AI는 기존 생성형 AI와 근본적으로 다른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텍스트를 읽고 답변하는 AI와 달리 로봇은 공간을 인식하고 물체의 위치와 형태를 파악하며, 움직임에 따른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로봇이 컵을 집으려면 컵의 위치뿐 아니라 크기와 모양, 주변 장애물, 손과 물체 사이의 거리, 힘의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결국 현실 세계의 물리적 환경을 학습할 수 있는 대규모 데이터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 데이터를 실제 환경에서 확보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현재 피지컬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 확보에는 원격조작(Teleoperation) 등 다양한 방식이 활용되고 있지만, 실제 학습 환경인 시뮬레이션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데이터 품질과 수집 속도, 비용 등의 문제가 존재한다. 엔닷라이트가 주목받는 이유도 이 지점이다.
‘트리닉스’와 같은 시뮬레이션 레디 데이터 기술은 실제 로봇을 반복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도 가상환경에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 AI를 학습시키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는 피지컬 AI 산업의 핵심 병목 가운데 하나인 ‘데이터 확보’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된다.
네이버가 엔닷라이트에 세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투자한 것도 이 같은 가능성을 주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번 투자는 네이버가 단순히 생성형 AI 서비스 경쟁에 머무르지 않고 AI 데이터 인프라와 피지컬 AI 생태계까지 투자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I 산업에서 데이터는 이미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피지컬 AI 시대에는 데이터의 종류 자체가 달라진다.
텍스트와 이미지뿐 아니라 3차원 공간정보, 움직임, 물리적 상호작용, 센서 데이터, 로봇의 행동 데이터가 중요해진다.
결국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보유했느냐를 넘어 누가 현실 세계를 AI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로 변환할 수 있느냐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피지컬 AI 데이터 시장은 로봇 산업과 함께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역시 피지컬 AI를 차세대 전략산업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향후 3년을 피지컬 AI의 글로벌 주도권을 결정할 중요한 시기로 보고, 대규모 데이터 생산·집적 인프라 구축과 독자적인 피지컬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등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특히 물리법칙을 반영한 대규모 합성데이터 생산체계 구축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산업계에서는 결국 ‘로봇을 누가 많이 생산하느냐’보다 ‘로봇을 누가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장기적인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로봇 하드웨어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를 움직이는 AI가 충분히 학습하지 못하면 실제 산업 현장에서 활용하기 어렵다. 반대로 양질의 학습 데이터가 확보되면 같은 하드웨어에서도 AI의 판단 능력과 작업 수행 능력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피지컬 AI는 단순한 로봇 산업의 확장이 아니다.
AI와 반도체,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통신, 로봇, 자율주행, 제조업이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연결되는 새로운 플랫폼 산업에 가깝다.
네이버 역시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검색과 콘텐츠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 역량에 더해 클라우드와 AI, 로봇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면서 AI 밸류체인을 넓혀가고 있다.
이번 엔닷라이트 투자는 그 가운데에서도 ‘데이터 생성’이라는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선제적 투자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네이버 D2SF가 한 번 투자하고 끝내는 방식이 아니라 2021년 첫 투자 이후 2022년 후속 투자, 올해 세 번째 후속 투자까지 이어갔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는 엔닷라이트의 기술과 사업성을 장기적으로 지켜보면서 성장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베팅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엔닷라이트 역시 이번 투자금을 바탕으로 사업 확대와 글로벌 성장 기반 마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에 따르면 엔닷라이트는 사업성 검증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한편 전 직군에 걸쳐 인재 채용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향후 시장의 관심은 엔닷라이트의 기술이 실제 로봇 제조사와 산업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적용될 수 있느냐에 쏠릴 전망이다.
피지컬 AI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면 적용 분야는 로봇 제조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조공장에서는 AI 로봇이 생산라인을 움직이고, 물류센터에서는 자율이동 로봇이 상품을 운반하며, 자율주행차와 드론은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의료·돌봄과 농업, 국방, 재난안전 등에서도 피지컬 AI 활용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피지컬 AI 데이터 인프라를 둘러싼 경쟁은 향후 AI 산업의 새로운 주도권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생성형 AI 시대가 ‘언어와 지식’을 둘러싼 경쟁이었다면 피지컬 AI 시대는 ‘현실과 행동’을 둘러싼 경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의 엔닷라이트 투자는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데이터 인프라를 선점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역시 피지컬 AI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향후 민간기업의 투자와 정부의 데이터·AI 인프라 정책이 맞물릴 경우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아직 피지컬 AI 시장은 성장 초기 단계다. 기술 표준과 데이터 확보 방식, 사업모델이 완전히 정착된 것은 아니며 실제 산업 현장에서의 경제성도 지속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투자 규모가 아니라 기술이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생산성과 효율성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네이버가 세 번째 후속 투자라는 카드를 꺼내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의 미래가 더 이상 모니터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화면 속에서 질문에 답하던 AI가 이제 공장에서 물건을 옮기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현실의 ‘행동하는 AI’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AI를 움직이는 핵심 자원은 결국 데이터다.
네이버의 이번 투자가 피지컬 AI 시대의 데이터 주도권 경쟁에서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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