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준형의 클담43] 투란도트, 무대를 지배한 보컬 리더십…탈색된 푸치니가 남긴 과제
2026 예술의전당 오페라,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김준형의 '클래식이 자라는 담벼락' Vol.43
2026년 7월, 초연 100주년을 맞이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투란도트>는 현역 최고의 드라마틱 소프라노 에바 프원카(Ewa Płonka)와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를 정복한 테너 백석종이라는 캐스팅의 무게만으로도 한국 오페라사에 기록될 성과였다.
공연의 첫 번째 전환점은 2막, 프원카가 부르는 "In questa reggia(먼 옛날, 이 궁전에서)"에서 찾아왔다. 피아니스트 출신다운 치밀한 구조적 조형미와 메조소프라노 출신의 단단한 저음역을 겸비한 프원카는 첫 노트부터 극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드라마틱한 흥분감을 살리면서도 정교하고 차분하게 텍스처를 짚어내는 엄격함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이 차분함은 이어지는 수수께끼 장면을 위한 서주에 불과했다.
수수께끼가 시작되자 프원카의 목소리는 강철 같은 스핀토 음성으로 오케스트라 피트의 음향을 뚫고 무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선 백석종의 칼라프 역시 가공할 만한 고음을 객석 깊숙이 꽂아 넣으며 팽팽한 음향적 긴장감을 조성했다. 특히 하이 C음을 주저 없이 내지르는 대담함은,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하며 축적해 온 그만의 발성과 배짱을 증명해 냈다. 두 사람이 "수수께끼는 세 개, 삶/죽음은 하나!"를 교차하며 터뜨린 대목은 이날 연주의 하이라이트였다. 이는 성악적 폭발을 넘어, 오페라 <투란도트>가 지닌 원시적, 극적 긴장감을 오로지 두 성악가의 노래 대결만으로 구현해 낸 명장면이었다.
백석종의 보컬 리더십은 1막 마지막 대목과 3막의 결정적 순간에서 더욱 고조되었다. 1막에서 류의 "Signore, ascolta(왕자님, 들어주세요)" 직후 이어진 "Non piangere, Liù(울지 마라, 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오케스트라와 가수의 호흡이 순간 어긋나는 대목이 있었으나, 백석종은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로 음악을 끌고 가는 내공을 보여주었다. 가수가 무대 위에서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음악 안으로 포섭한 장면이었다. 이러한 노련함은 3막 칼라프의 아리아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로 이어졌다. 백석종은 원시적인 힘과 압도적인 성량으로 찬란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특히 "Vincerò!"의 절정음을 길게 지탱해 내며 객석에서 전율에 가까운 카타르시스와 폭발적인 갈채를 이끌어냈다.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각광받는 최고의 칼라프인가를 스스로 증명한 대목이다.
류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는 1막의 "Signore, ascolta!(들어주세요, 왕자님)"에서 정갈하고 정교한 선율선을 바탕으로, 극도로 절제된 피아니시모와 메차 디 보체를 구사하며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연주 초반의 정갈한 학구적 냉철함은 이탈리아 오페라 특유의 열기와 다소 거리가 있는 듯했으나, 드라마가 전개됨에 따라 표현의 온도와 활기를 올려나갔다. 마침내 3막 자결 장면("Tu che di gel sei cinta / 얼음으로 둘러싸인 당신도")에 이르러 황수미의 가창은 완벽한 피날레를 이뤄냈다.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색이 지닌 음향적 투명도를 극대화하며 피를 토하듯 숭고한 희생이 리듬을 타고 올랐다. 티무르 역의 베이스 심인성 역시 빈 슈타츠오퍼 등 유럽 주요 무대를 정복한 베이스답게 깊고 단단한 저음역의 울림으로 든든하게 받쳐주며 작품의 비장미를 완성했다.
이날 공연의 논쟁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에스트로 로베르토 아바도가 던져주었다. 아바도가 끌어낸 푸치니는 우리가 알고 있던 감상적이고 화려하며 화사한 색채의 푸치니가 아니었다. <투란도트>가 내포한 감정을 배제하고, 무채색에 가까운 느리고 장엄한 울림으로 음악을 제시했다. 타악기군의 금속성 잔향을 활용한 음향 효과는 서늘한 원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푸치니 특유의 다층적인 색채는 소거되었다. 특히 핑, 팽, 퐁이 등장하는 희극적 패시지에서조차 생동감과 익살스러움이 가려진 채 엄숙하고 무겁게 극을 끌고 갔다.
나아가 푸치니가 어린이 합창 등에 배치한 중국 민요 '모리화' 선율 등 동양적 이색(異色)을 다룰 때, 서양 낭만주의 오케스트레이션의 질감에 머무른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지휘자의 지적이고 냉철한 구조적 요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역시 오랜 연주 피로의 누적으로 인해 음정의 정교함이 떨어지고 푸석한 음색을 드러내며 푸치니 관현악 고유의 윤기를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
2026년 예술의전당 <투란도트>는 세계 오페라 무대 최전선에 서 있는 주역진의 탁월한 가창, 그리고 관습적 관현악의 색채를 거둬낸 지휘자의 시도가 교차한 무대였다. 관현악의 체질적 완성도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에바 프원카와 백석종, 황수미가 보여준 수준 높은 연주력과 수수께끼 장면의 압도적인 음향적 긴장감은 한국 오페라 연주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준형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에서 SAC’s choice 코너를 3년간 연재했으며, 객석, 피아노 음악,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월간 오디오 등 음악 관련 매체들에 오랫동안 칼럼을 기고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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