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준형의 클담41] 꿀띠쉐프, 폭풍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명징한 이성
밀레니엄심포니,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라흐마니노프 김준형의 '클래식이 자라는 담벼락' Vol.41
세속적인 화려함이나 대중적인 마케팅 문법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만의 고고한 보폭으로 음악적 순수성을 탐구하는 연주자가 있다. 2007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의 주인공이었던 미로슬라브 꿀띠쉐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중의 일시적인 환호보다 평론가들의 깊은 찬사가 먼저 닿는 지점에 서 있는 그는, 이번 라흐마니노프 마라톤 무대를 통해 자신이 왜 러시아 피아니즘의 가장 지적이고 고고한 자산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프로그램은 라흐마니노프의 창작 궤적을 관통하는 동시에 피아니스트에게는 지독할 정도의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6월 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최영선이 지휘한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첫날 무대는 <피아노 협주곡 제4번>과 <제2번>을 전반부에 배치하여 독특한 구조적 균형을 선보였다. 조지 거슈윈의 재즈풍 화성과 후기 낭만주의적 전통이 교차하는 4번 협주곡은 파편화된 모티프가 빠른 속도로 교차하는 난해한 텍스처를 지닌다.
꿀띠쉐프는 감정의 과잉을 엄격히 배제한 채, 치밀한 대위법적 구조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정교한 시계장치를 다루듯 각기 악상들을 유기적으로 엮어냈으며, 기묘한 불안감이 감도는 2악장(Largo)의 고독을 과장됨 없이 담백한 서정으로 이끌어냈다. 3악장의 복잡한 당김음 역시 날렵한 스타카토로 요리해내며 곡 고유의 모더니즘적 가치를 정확히 짚어냈다.
이어 연주된 <협주곡 제2번> 역시 통속적 감상의 덫을 철저한 이성으로 걷어냈다. 1악장 도입부의 저음 연타는 위압적인 완력 대신 음 하나하나의 잔향이 맑게 살아나는 명징함으로 채워졌다. 유장한 선율이 돋보이는 2악장(Adagio sostenuto)은 과도하게 템포를 밀고 당기지 않고, 정교한 레가토를 통해 고결한 슬픔을 담담하게 구현해냈다. 3악장 또한 화려함보다 단단한 고전적 골격을 유지하며, 육중한 오케스트라 총주 속에서도 피아노의 텍스처를 투명하게 분리해내는 격조를 보여주었다.
누구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많이 하는 최영선과 밀레니엄심포니는 일치된 호흡으로 연마된 장인으로서 완숙도 높은 관현악을 들려주었다. 아울러 이날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로 2부에서는 시베리아 출신으로 이 작품에 관한한 독보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1번과 3번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틀 뒤인 6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는 장윤성이 지휘하는 밀레니엄심포니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와 <피아노 협주곡 제3번>으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다. 24개의 변주가 쉼 없이 휘몰아치는 랩소디에서 그는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터치로 곡에 내재된 악마적 위트와 '디에스 이레' 모티프의 서늘한 긴장감을 입체적으로 부각시켰다. 통속적인 도취로 흐르기 쉬운 제18변주에서는 감상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현악기적인 호흡을 선보였다. 이는 바이올리니스트 카미오 마유코와의 오랜 음악적 교감에서 비롯된, 피아노로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정제된 창법(Cantabile)의 정수였다.
랩소디에 이어 난해한 <협주곡 제3번>을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결코 정연함을 잃지 않았다. 1악장 도입부의 소박한 성가풍 선율은 담담하게 출발해 거대한 골격으로 확장되었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카덴차에서도 투명한 타건으로 복잡한 텍스처를 풀어내었다. 옥타브 연타와 거대한 관현악의 파도가 부딪치는 3악장에서도 명징한 타건을 유지했다. 무리한 음량으로 건반을 내려치는 대신, 치밀하게 설계된 악보의 행간을 논리적으로 조각하며 흔들림 없는 페이스 배분을 증명해 보였다.
청중의 갈채를 받으며 다시 무대의 등장하여 플레트네프가 편곡한 차이콥스키 발레 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가운데 ‘아다지오’를 화사하고 생동감 넘치게 들려주고, 곧이어 앞서 연주한 <랩소디>의 저 유명한 제18변주를 오케스트라와 한 번 더 연주해 주었다. 감동적이었다.
꿀띠쉐프는 거친 음량으로 건반을 압도하는 연주자가 아니다. 대중이 소비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전형적인 '매운맛' 사이에서, 그가 제시한 '지적으로 통제된 명징한 낭만'은 독보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주류 클래식 산업이 규정한 천편일률적인 스타의 경로를 따르기보다 고집스럽게 러시아 피아니즘의 순수성을 지켜온 이 고결한 예술가는 이번 이틀간의 성찬을 통해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고하게 웅변하고 있었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준형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에서 SAC’s choice 코너를 3년간 연재했으며, 객석, 피아노 음악,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월간 오디오 등 음악 관련 매체들에 오랫동안 칼럼을 기고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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