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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클담38] 파비오 루이지와 NHK교향악단, 정교한 투명성으로 빚어낸 고결한 안식

NHK교향악단 제2060회 정기연주회 김준형의 '클래식이 자라는 담벼락' Vol.38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은 죽음을 앞둔 거장의 담담한 고백이자, 미완의 형식을 빌려 완성된 신비로운 우주다. 지난 4월 11일 NHK홀에서 울려 퍼진 파비오 루이지와 NHK교향악단의 연주는 이 거대한 유작을 ‘정교한 투명성’으로 재구성했다. 루이지는 브루크너의 육중한 음향 이면에 숨겨진 현대적 색채와 유기적인 질감을 섬세하게 길어 올리며, 독자적인 미학을 선보였다. 

파비오 루이지(사진_NHK교향악단)
파비오 루이지(사진_NHK교향악단)

이번 연주회는 전반부 얀 포글러가 협연한 하이든 <첼로 협주곡 제1번>과 후반부 브루크너 <교향곡 제9번>으로 구성되었다. 전반부 협연에서는 포글러의 해석적 개성이 드러났으나, 음정과 기술적인 안정성 측면의 완결도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반면 오케스트라는 전반부에서도 균형 잡힌 반응과 정교한 앙상블로 이를 안정적으로 지지했으며, 후반부 브루크너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집중력과 완성도로 무대를 장악했다.

NHK교향악단은 아시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브루크너 연주사를 갖고 있다. 과거 요제프 카일베르트 같은 거장들이 빚어낸 선이 굵고 장대한 독일 브루크너 연주의 유구한 전통은 NHK교향악단에 브루크너를 깊게 각인시켰다. 이후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보여준 고결한 구조미와 엄격한 객관성을 거치며 이들의 브루크너는 더욱 정교해졌다. 로브로 폰 마타치치 역시 NHK교향악단의 브루크너 연주 전통을 확립하는데 현격한 영향을 준 거장이다. 정통 브루크네리안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개성 넘치는 독자적인 횡보로 일가를 이뤘다. 이제 상임지휘자 파비오 루이지의 시대에 이르러, 이 전통은 이탈리아 지휘자 특유의 유연한 흐름과 투명한 텍스처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_NHK교향악단)
(사진_NHK교향악단)

포문을 연 1악장은 은은한 출발과 함께 부드러운 몰입을 유도했다. 도입부의 떨림은 청중을 음악의 흐름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포용력을 지녔다. 특히 1주제에서 보여준 적정한 템포 설정은 곡의 입체적인 추진력을 배가시켰다. 루이지는 금관의 울림을 과하게 분출하기보다 내면으로 압축하며 깊이감을 더했고, 그 위로 흐르는 첼로 파트의 유려한 노래는 9도 도약이 주는 긴장감을 딛고 찬연하게 빛났다. 현악과 금관이 상충하지 않고 정갈하게 완성된 밸런스는 실내악적 치밀함마저 느끼게 했다.

2악장 스케르초에 이르러 루이지의 해석은 다시 한번 그 예리함을 드러냈다. 차갑고 매섭게 몰아치는 리듬감은 명징한 타격음으로 치환되었고, 날카로운 피치카토는 곡에 내재된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해방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트리오의 처리였다. 매우 빠른 템포 설정을 통해 환각을 질주하는 듯한 유기적인 흐름을 확보했는데, 이는 저음역 베이스의 탄탄한 지지 덕분에 구조적 안정감을 잃지 않았다. 금관의 기능성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구현된 이 명료한 텍스처는 루이지가 추구하는 현대적 브루크너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했다.

(사진_NHK교향악단)
(사진_NHK교향악단)

이날 연주의 백미는 '사랑하는 하나님께' 바쳐진 3악장 아다지오였다. 서늘한 서주로 시작된 고별의 여정은 장엄함보다는 영적인 투명함에 가까웠다. 트롬본을 필두로 한 금관군이 보여준 온건한 템포 안에서의 찬양과 탄식은, 인간적 고통이 신성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바그너 튜바와 호른이 만들어내는 저음역의 성숙한 음색은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며 내면의 심연을 응시했다.

마지막 코다에 이르러 소리가 잦아드는 과정은 마치 시간이 자연스럽게 정지하는 것처럼 느긋하고 유연했다. 폭발적인 클라이맥스 이후에 찾아온 이 정화된 침묵은 미완성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거장의 뒷모습과도 같았다. 파비오 루이지는 NHK교향악단의 정교한 합주력을 도구 삼아 브루크너 9번의 숭고함을 극대화했다. 그것은 가장 고결한 안식이었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준형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에서 SAC’s choice 코너를 3년간 연재했으며, 객석, 피아노 음악,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월간 오디오 등 음악 관련 매체들에 오랫동안 칼럼을 기고해 오고 있다.

(포스터_NHK교향악단)
(포스터_NHK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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