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준형의 클담45] 서로 다른 개성으로 빛난 한여름의 축제 - 제4회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피아니스트 베조드 압두라이모프, 남성 소프라노 사무엘 마리뇨, 첼리스트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김준형의 '클래식이 자라는 담벼락' Vol.45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로 자리 잡은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가 올해로 제4회를 맞았다. 2021년 팬데믹이라는 제약 속에서 국내외 연주자들의 연대와 교류를 표방하며 출범한 이 음악제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솔리스트들과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을 꾸준히 소개하며 음악제의 외연을 넓혀왔다.
올해 음악제에서 특히 주목할 만했던 것은 세 명의 솔리스트, 피아니스트 베조드 압두라이모프, 남성 소프라노 사무엘 마리뇨, 첼리스트 아나스타샤 코베키나의 무대였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세 연주자가 각기 다른 레퍼토리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리스트와 스트라빈스키에서 빛난 압두라이모프의 강렬한 피아니즘
8월 20일 무대를 연 베조드 압두라이모프의 리사이틀은 프로그램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1부의 첫 곡은 브람스의 <네 개의 피아노 소품 Op.119>였다. 압두라이모프는 우리가 흔히 브람스에게서 기대하는 두텁고 중후한 음향과는 달리 상당히 투명하고 명징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선율의 윤곽을 섬세하게 살리면서도 페달 사용을 절제해 각각의 음이 또렷하게 들렸다. 제1번 인터메초의 하강 음형에서도 감상적인 정조를 크게 부풀리지 않았다. 담담하고 명료하게 음악을 풀어갔다. 제4번 랩소디에 이르기까지 절제된 흐름을 유지하면서 말년 브람스의 고독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다만 이날 압두라이모프의 매력은 브람스보다는 이후의 작품에서 훨씬 분명하게 드러났다.
체르니의 <로데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빠른 패시지와 장식음을 맑고 정교하게 처리했다. 비엔나의 화려한 양식이 요구하는 기교를 부담스럽지 않게 들려준 점도 좋았다. 1부의 마지막 곡인 리스트의 <단테를 읽고: 소나타풍의 환상곡>에 이르러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압두라이모프는 넓은 다이내믹과 묵직한 타건으로 리스트의 극적인 세계를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지옥의 공포에서 천상의 구원으로 향하는 작품의 흐름이 커다란 스케일로 펼쳐졌다. 체르니에서 들려주었던 투명한 음색과는 전혀 다른 강렬함이었다.
2부의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시카 중 세 개의 악장>은 이날 연주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였다. 피아노 한 대로 관현악곡의 복잡한 리듬과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작품이다. 압두라이모프는 빠른 리듬과 반복되는 음형을 정확하게 처리하면서도 음악의 추진력을 놓치지 않았다. 피아노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들리는 순간도 있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은 앞선 프로그램의 강렬함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리사이틀을 마무리했다. 이날 압두라이모프의 진가는 브람스보다는 리스트와 스트라빈스키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바로크 성악의 외연을 확장한 남성 소프라노
이어진 사무엘 마리뇨와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의 협연은 헨델 음악의 화려함과 바로크 성악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무대였다.
저명한 소프라노 바버라 보니에게 사사하고, 잊힌 바로크 작품의 발굴과 부활을 위해 앙상블 테세오를 창단한 마리뇨는 단순히 희소한 음역을 가진 성악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신체적 특성과 파리 음악원에서의 전문적인 훈련이 결합된 그의 목소리는 카스트라토와 당대 소프라노들이 발전시킨 벨칸토의 전통을 오늘의 무대에서 새롭게 들려줬다.
1부의 오페라 <로델린다> ‘돌아오세요, 내 사랑’에서는 사랑하는 이의 귀환을 바라는 로델린다의 애절함을 부드러운 선율로 표현했다. 이어진 <줄리오 체사레> ‘저를 가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간청과 불안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음색과 정교한 호흡이 돋보였다. 높은 음역을 과시하기보다는 선율과 억양을 세밀하게 다루면서 인물의 감정을 살려냈다. <시로에> ‘이제 나는 희망을 잃었네’와 <줄리오 체사레> ‘내 운명을 슬퍼하리라’에서는 슬픔과 절망의 정서가 한층 깊어졌다. 높은 음역에서도 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2부의 오라토리오 <명랑한 사람, 사색적인 사람, 그리고 온화한 사람> 중 ‘사랑스러운 새여’에서는 플루트와의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성악과 기악이 서로 경쟁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마리뇨의 화려한 콜로라투라와 바로크 음악 특유의 맑은 분위기가 잘 어울렸다. 남성적인 파워, 그리고 메조소프라노를 방불케 하는 강력하고 풍성한 저역, 그리고 완벽한 콜로라투라 고음역 기교까지. 성악 예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줄리오 체사레> ‘폭풍우에 부서진 배가’에서는 빠른 콜로라투라를 가볍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헨델 특유의 화려한 기교가 본격적으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발레리노로 예술 이력을 시작한 마리뇨다운 춤사위 역시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알레산드로> ‘내 영혼 안에서 빛나네’에 이르러서는 18세기 런던 오페라의 화려한 비르투오시티가 펼쳐졌다. 이 무대에서 마리뇨의 존재감은 단순히 높은 음역을 구사하는 성악가라는 데 머물지 않았다. 성별과 시대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음악적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그의 음성은 바로크 오페라의 독특한 연극성을 오늘의 무대에서 다시 환기했다.
하지만 이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순간은 앙코르였다. 마리뇨가 선택한 헨델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였다. 앞서 화려한 콜로라투라와 높은 음역을 마음껏 들려주었던 것과 달리, 이 곡에서는 소리를 한층 낮추고 긴 호흡으로 선율을 이어갔다.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 찾아온 적막이 강렬했다. 극적인 절창 뒤에 남은 고요함. 이날 마리뇨의 가장 깊은 인상은 가장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를 덜어낸 마지막 순간에 있었다.
독주자의 해설과 내면적 침잠이 돋보인 코베키나
8월 22일과 23일 양일간 이어진 맨발의 첼리스트, 아나스타샤 코베키나의 무대는 첼로 하나로 고전과 현대, 독주와 협연을 오갔다. 두 무대의 성격은 상당히 달랐지만, 코베키나가 가진 섬세한 음악성은 같았다.
22일의 무반주 리사이틀은 별도의 인터미션 없이 진행됐다. 코베키나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작품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중심에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1번 G장조, 제2번 d단조, 제3번 C장조가 놓였다. 그 사이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12세기 중세 성가를 비롯해 조니 그린우드, 브라이스 데스너, 페테리스 바스크스, 블라디미르 코베킨 등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배치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음악을 번갈아 들으니 각 작품의 성격이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다. 바흐에서는 첼로의 울림을 깊이 들여다보는 듯한 집중력이 있었고, 현대 작품에서는 보다 과감한 음향을 들려주었다.
코베키나는 바흐의 빠른 패시지를 서두르지 않았다. 작은 음량에서도 음정과 프레이즈를 세심하게 다뤘다. 현대 작품에서는 첼로가 낼 수 있는 다양한 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마지막 솔리마가 편곡한 보케리니 <판당고>에서는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다. 앞선 작품들에서 보여준 진지함을 내려놓고 리듬과 생동감을 마음껏 살렸다. 앵콜로 들려준 <부라넬라의 노래>에서 정교한 피치카토 기교뿐 아니라 노래 솜씨까지 깜짝 공개되었다. 진지하면서도 흥미로운 리사이틀이었다.
23일 폐막 무대에서는 예술의전당이 자랑하는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제1번을 협연했다. 전날의 무반주 무대와 달리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함께했지만 코베키나의 첼로는 당당했다. 제1악장에서 독주 첼로가 제시하는 네 음의 동기는 과장되게 부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고 밀도 있는 연주로 오케스트라의 두터운 음향 속에서도 자신의 선율을 분명하게 유지했다. 목관과 현이 가라앉은 가운데 호른 한 대와 첼로가 주고받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제3악장의 카덴차. 오케스트라가 멈춰 선 가운데 홀로 이어가는 첼로의 피치카토와 섬세한 프레이즈에는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고독이 배어 있었다. 크게 소리를 내지 않아도 충분히 긴장감이 있었다. 이날 코베키나의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였다.
서로 다른 개성이 만난 여름의 음악제
제4회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에서 만난 세 연주자는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이번 음악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같은 클래식 음악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순간도 있었고, 작은 소리와 긴 침묵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순간도 있었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만난 세 연주자의 무대는 클래식 음악의 다양한 표정을 다시 확인하게 한 자리였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준형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에서 SAC’s choice 코너를 3년간 연재했으며, 객석, 피아노 음악,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월간 오디오 등 음악 관련 매체들에 오랫동안 칼럼을 기고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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