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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달의 흑백풍수 칼럼] 좌와 향, 어디에 앉아 어디를 볼 것인가
6·70년대만 해도 환갑을 넘기면 장수의 잔치를 베풀었다. 농번기(農繁期)를 제외하면 어른들은 산으로 묏자리를 찾아다니는 일이 흔했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으면 훗날을 위해 가묘(假墓)를 해두기도 했다. 자신의 묏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 당시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풍수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좌(坐)와 향(向)이다. 혈처(穴處)를 살핀 뒤 좌향을 정하고, 마지막에는 분금(分金)으로 마무리한다. 그만큼 좌향은 풍수의 핵심에 놓인다. 풍수를 배우는 일이 결국 좌향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坐)는 앉은자리이고 향(向)은 바라보는 방향이다. 풍수에서 좌와 향은 단순히 방위의 눈금을 정하는 일이 아니다. 산과 물의 흐름을 살피고 생기(生氣)를 얻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그 기운이 머무는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풍수지리는 생(生)을 맞이하고 살(殺)을 피하는 이론이다. 자연에는 생기(生氣)를 품은 곳이 있는가 하면 기운이 막히고 부딪히는 곳도 있다. 사람은 그 흐름을 살펴 자신에게 유리한 자리를 찾는다. 기(氣)가 생(生)을 좇고 쇠(衰)함을 피하는 것이 지리의 이치이며, 이를 형세와 이론으로 구분하는 것이 풍수의 법이다. 그 결과로 얻는 곳을 혈처(穴處)라 한다.
결국 좌와 향도 기의 흐름에 따라 결정된다. 아무리 좋은 산세(山勢)라도 혈처를 제대로 찾지 못하면 그 힘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 혈처를 찾았더라도 좌향이 어긋나면 주변의 산수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마지막 한 치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긴다.
수만 리를 힘 있게 내려온 산맥도 혈처(穴處)에 이르러 그 힘을 드러낸다. 긴 산맥이 하나의 혈처로 모이고, 그 혈처에서 좌와 향이 정해진다. 자연의 큰 흐름이 한 지점에서 결정된다. 좌향은 단순한 방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과 사람이 머무는 자리를 연결하는 법칙이다.
맹자는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라 했다. 하늘의 때가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 땅의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좋은 때와 좋은 땅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계와 조화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좋은 땅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 풍수에서 좌향을 정하는 일도 결국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일이다.
풍수는 단순한 방위술로만 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산과 물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기(氣)의 흐름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형이하(形而下)와 형이상(形而上)의 관계 속에서 자연의 법칙을 찾는 것이 풍수의 오래된 방식이다. 수많은 용어와 이론도 결국 하나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홍콩에서는 건물의 형태와 방향을 매우 민감하게 살핀다. 옆 건물의 뾰족한 부분이 자신의 건물을 향하면 불길한 기운으로 여기고 이를 막는다. 자연과 건축물의 관계를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다. 그들에게 풍수는 특별한 의식이라기보다 삶의 일부에 가깝다.
불리한 환경을 피하고, 좋은 집과 직장을 찾고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정하는 것도 결국 삶의 좌와 향을 정하는 일인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자리가 있다. 그러나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같은 자리에 앉아도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좌는 현재의 자리이고 향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다.
명당이 천하의 지위를 가진다는 말도 결국 좋은 자리와 좋은 방향이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풍수에서 좌와 향이 하나의 짝을 이루듯 삶에서도 자리와 방향은 떨어질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어떤 자리에 앉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이다.
산은 오랜 세월 한 방향으로 흐르다 마침내 하나의 혈을 만든다. 사람의 삶도 수많은 시간을 지나 하나의 방향을 만든다. 좌는 내가 앉은자리이고, 향은 내가 바라보는 곳이다.
그러므로 묻게 된다. 나의 인생은 지금 어디에 앉아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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