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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의 프레임] 사라지고 남겨지다, “몸이 기억하는 가장 우아한 상실”

빛은 몸을 조각하고, 음악은 공간을 입다 이소미의 안무와 박창수의 음악이 만들어낸 감각의 풍경

공연은 시작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연이라는 경계 자체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객석이 채워지는 동안에도 무대 위에서는 이미 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벽에는 흔적이 새겨지고, 손끝은 투명한 벽을 더듬으며, 몸들은 바닥을 기어 시간의 결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어떤 프롤로그보다 강렬했다. 마치 전시장의 첫 작품 앞에 선 것처럼, 관객은 해석보다 먼저 감각을 요구받았다.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안무가 이소미와 함께 몸짓을 펼친 다섯 무용수(김재은, 서주원, 장보경, 허명원, 허채연)의 <사라지고 남겨지다>는 춤을 보여주기보다 몸이 기억하는 시간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소미는 이 작품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남겨진 이후 몸에 남는 여러 감각들을 각각의 장면으로 분리해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프롤로그와 네 개의 테이크, 그리고 에필로그는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침묵과 무력감, 분노와 반복되는 실패, 그리고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감각이 서로 다른 질감으로 흩어졌다가 하나의 정서로 모여든다. 상실은 사건이 아니라 몸의 상태가 되고, 기억은 서사가 아닌 움직임으로 남는다. 보이는 몸짓 너머 보이지 않는 의미를 길어 올리는, '상외지상(象外之象)'의 미학이었다.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무대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의외로 몸이 아니라 빛이었다. 조명은 무용수를 비추는 장치를 넘어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였다. 인물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빛은 무대를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했고, 순간마다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냈다. 때로는 미디어아트처럼, 때로는 거대한 설치미술처럼 변화하는 장면들은 블랙박스 극장의 물성을 잊게 만들었다.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그 위를 흐른 것은 박창수가 빚어낸 열두 곡의 음악이었다. 오랜만에 무용음악으로 돌아온 그는 "음악이 몸을 만나고, 움직임이 다시 음악에 숨을 불어넣는 과정을 다시 경험하며 반가움과 설렘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이번 음악은 춤을 따라가지 않았고, 춤 역시 음악을 설명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흡을 불어넣으며 하나의 감각을 완성해갔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처음 공개된 7.1채널 사운드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악기로 바꾸며 공연장을 거대한 공명체로 만들었다. 공간을 가득 메운 소리는 몸을 감싸 안았고, 몸은 소리를 따라 움직였으며, 소리는 다시 몸을 입었다. 음악과 춤이 한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했다는 박창수의 말은 무대 위에서 하나의 감각으로 구현됐다.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오히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몸들이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Take 3 ‘외칠 수 없는 외침’. 그 침묵은 어떤 대사보다 선명했다.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을 삼킨 채 살아가는가. 얼마나 많은 감정이 끝내 몸 안에만 머물러 있는가.

이 질문은 무대를 지나 객석으로 스며든다. "무엇이 사라지고 있으며, 무엇이 남겨지고 있는가." 이소미가 작품을 통해 던진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몸을 향한다. 타인과 닮아가기를 강요받는 순간에도 몸은 끝내 자신만의 틈새를 찾아간다. 그 틈은 무너짐의 흔적이면서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기도 하다.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마지막 장면에서 작품은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기적도, 치유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한 극복도, 완벽한 사라짐도 아닌, 상실 이후에도 몸은 아주 작은 호흡으로 다시 살아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래서 <사라지고 남겨지다>는 이소미의 말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선택해서 남겨진 몸이 다시 자신을 발견해 가는 여정"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슬픔을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상실 이후에도 끝내 자신만의 리듬을 되찾아가는 몸의 우아함을 끝까지 응시한다.

문득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어록으로 알려진 "우아함은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공연 역시 그랬다.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이소미_사라지고 남겨지다 ⓒShin-joong Kim

무용수들의 몸짓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벽에 남겨진 흔적과 공간을 떠돌던 음악은 공연장을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감각의 표면에 머물렀다.

결국 남겨진 것은 몸이 기억하는 시간, 그리고 상실을 견뎌낸 몸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우아한 아름다움이었다. 사라진 것은 무대뿐이었고, 커튼콜에 흐른 제프 버클리의 ‘Hallelujah’는 관객과 무용수, 스태프 모두를 어루만지며 또 하나의 위로를 남겼다.

사라지고 남겨지다(포스터_SOMEE)
사라지고 남겨지다(포스터_SO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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