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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달의 흑백풍수 칼럼] 형상이 생기면 이치가 따른다
산과 들, 그 본바탕에 형상이 주어지면 이치(理致)가 부여된다. 건축물을 올리면 집과 사무실이 되고 조상을 모시면 산소가 된다. 자연은 한 가지의 형상이 만들어지면 반드시 한 가지 이치를 부여한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법칙이 아니라 자연불변의 이치이다.
여기에 손상이 가해지면 자연의 법칙이 파괴된다. 이것이 바로 살(殺)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흔히 살이라 하면 막연한 두려움이나 미신처럼 생각하지만 본래의 뜻은 자연의 균형이 깨질 때 발생하는 충돌의 기운이다. 물길을 억지로 막고 산맥을 끊으며 사람이 머물 자리를 탐욕으로 거스르면 결국 그 부작용은 나에게 되돌아온다.
풍수지리는 내적으로 생기를 완성(成生氣)하고 외적으로 걱정거리를 피하는 것(避五患)에 있다. 걱정이 없어진다는 것은 편안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먹은 바를 안정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흔들리면 작은 일도 이루기 어렵다. 공간의 기운이 단순하고 안정되면 언행도 안정된다. 옛사람들이 집터를 정할 때 산과 물을 먼저 본 까닭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풍수의 풍(風)은 바람이 불면 기(氣)가 움직이는 것이다. 즉 형상의 움직임을 말한다. 수(水)는 물이 들어오고 나감이다. 물은 하늘의 이치를 대신한다. 예전에는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였고, 혼례를 치를 때도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운데 두었다. 먼 타국에서 부모의 부고를 들으면 물을 떠놓고 북향에 절하며 곡을 올렸다. 물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상징이었다.
풍수에서 이론과 실제는 결국 물과 산의 형상으로 귀결된다. 먼저 물의 들어오고 나감을 보고 땅의 자격론을 판단한다. 다음으로 산맥의 흐름과 형상을 보고 힘의 등급을 본다. 그리고 좌향으로 하늘과 땅의 살을 피하면서 동시에 맑고 강한 기운을 받는다. 그래서 옛 지리서에는 "먼저 물을 살피고 다음으로 용맥을 본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좋은 땅은 경치 좋은 곳이 아니다. 기운이 강해도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약해도 생기가 머물지 않는다. 풍수는 조화를 찾는 학문이다. 욕심이 지나치면 몸이 병들고 마음이 허하면 삶이 흔들린다. 자연과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 같지만 같은 이치 속에서 움직인다.
사람은 여자의 난자 생성 주기와 남자의 정자 생성 주기, 그리고 임신 기간을 합하여 일 년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 그래서 사람을 소우주라고 하였다. 사계절과 24 절기의 변화가 인간의 몸과 마음에도 그대로 반영된다는 뜻이다. 봄 여름에는 성장하며 가을 겨울에는 쉬어야 한다. 현대인은 자연의 흐름을 잊고 살아간다. 밤낮이 뒤바뀌고 계절의 질서를 거스르며 살아가니 몸과 마음이 힘든 것이다.
사람들은 높은 건물과 화려한 인테리어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공간의 기운은 보지 않는다. 자연의 이치를 벗어난 부조화의 공간에서도 돈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기가 없는 공간에서는 생각도 혼란스럽다. 억지춘향 격으로 재물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좋은 기운이 머무는 곳에 삶도 함께 안정되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기술이다. 구구단처럼 정확하다. 많이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른다. 그래서 반풍수가 생긴 것이다. 법칙은 보지 못한 채 말만 앞세우고 이치보다 욕심을 우선하니 결국 풍수가 미신처럼 변질되기도 한다.
천지에는 스스로의 이치가 있고 산천에는 저마다의 형상이 있다. 형상이 바르면 기운이 머물고 이치가 어그러지면 살이 따른다. 풍수는 허황한 술법이 아니다. 천지의 이치를 살피고 사람의 삶을 바르게 두려는 오래된 기술이다.
알면 길이 보이고 모르면 겉모습만 좇게 된다. 그러므로 풍수의 본뜻은 결국 자연의 질서를 깨닫고 인간이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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