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준형의 클담36] 나부코, 체스판 위의 광기… 정교한 벨칸토 질서 속에 투영된 구원의 서사
서울시오페라단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김준형의 '클래식이 자라는 담벼락' Vol.36
주세페 베르디의 출세작 <나부코>는 권력이라는 허망한 가치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광기와 그 이면에 숨겨진 비극성을 극명하게 투영한 작품이다. 1986년 국내 초연 이후 정확히 40년 만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 이번 프로덕션은,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를 거대한 '체스판'으로 설정하여 인물들 간의 욕망과 신념의 충돌을 냉철한 기하학적 미학으로 해부해 냈다. 이는 단순한 고전의 재연을 넘어, 벨칸토(Bel Canto)의 엄격한 구조 안에서 초기 베르디의 에너지가 어떻게 현대의 드라마로 치환되는지를 증명하려는 진지한 음악적 성찰의 현장이었다.
벨칸토의 정교한 미학 속에 노출된 음색적 외연의 한계
성악적 성취의 중심에는 아비가일레 역의 소프라노 최지은이 있었다. 그녀는 벨칸토 오페라가 요구하는 기교에 매우 근접한 가창을 선보였다. 특히 2막 카바티나 ‘나도 한때는 행복에 마음을 열었었지’에서 보여준 피아니시모의 통제력이 훌륭했다. 정제된 호흡을 통해 음색의 밀도를 유지하며 뽑아낸 메사 디 보체(Messa di Voce)가 아름다웠고, 투명하고 가느다란 고음으로 아비가일레의 순수함을 노래했다. 이어지는 카발레타에서 고음역의 밀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3막 이중창 ‘여인아, 너는 누구냐(Donna, chi sei?)’에서도 나부코와 팽팽한 대척점을 이루며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성악적 서사를 완성해 냈다. 다만, 음역 간의 불균질한 밀도는 성악적 완결성을 미묘하게 저해했으며, 결과적으로 드라마틱한 서사의 무게를 지탱해야 할 소리의 기둥이 배역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감당하기에는 다소 가냘프게 느껴졌다는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베르디가 의도한 거칠고 두꺼운 흉성(Chest Voice)의 활용이 상대적으로 희석되면서 배역 특유의 음역대가 지닌 극적 중량감을 온전히 확보하는 데 과제를 남기기도 했다.
나부코 역의 캐스팅별 대비는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했다. 바리톤 최인식은 안정적인 기량을 보여주었으나, 해석의 방향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카푸칠리나 브루존 같은 전설적인 베르디 바리톤들이 음악적 서사를 견인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최인식은 정제된 독일 리트풍의 미감을 강조했다. 유려한 레가토의 아름다움은 훌륭했으나, 나부코 특유의 선 굵은 악센트와 언어가 지닌 극적 타격감이 아쉬운 가창은 제왕의 위엄을 내밀한 영역으로 자리한 인상을 남겼다.
반면 바리톤 양준모는 배역에 대한 연극적 통찰은 뛰어났으나, 소리의 질감 면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와의 거리감을 노출했다. 베르디 바리톤 특유의 풍부하고 둥근 울림 대신 날카롭게 벼려진 음색은 제왕의 위엄이나 참회하는 아버지의 깊은 서정성을 형상화하기엔 일말의 미완을 남겼다. 배역의 심리적 궤적을 쫓는 진지한 천착에도 불구하고 성악적 질감 자체가 지닌 본연의 음향적 밀도가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대한 서사를 담아내기엔 다소 내성적이었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임채준의 탁월한 양식미와 최공석의 강렬한 존재감
자카리아 역의 베이스 임채준은 스칼라 극장 주역다운 탁월한 양식미를 뽐냈다. 기도 장면에서 보여준 그의 보컬 라인은 성스러운 사제의 품격을 구현했으나, 유대 민족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대지를 울리는 권위적인 저음의 양감은 기대보다 약하게 다가왔다. 이는 선율의 선명도를 확보하는 대신 묵직한 질량을 일정 부분 양보한 결과로 읽힌다. 한편, 바알의 대제사장 역을 맡은 베이스 최공석은 무대를 압도하는 실체감 있는 연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역에 걸맞은 강렬한 위엄과 성악적 존재감을 발산하며 극의 긴장감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악적 드라마를 지탱한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연주 역시 훌륭했다. 오케스트라는 초기 베르디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벨칸토 오페라의 유연한 선율미를 정교하게 살려내며 베르디의 야성과 우아함을 동시에 만끽하게 했다. 60명의 시민합창단이 가세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서 빚어낸 웅장한 화음은 이번 공연이 지향한 공동체적 서사의 정점을 찍었다.
결론적으로 2026년의 <나부코>는 벨칸토적 질서와 베르디적 열정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현장을 목도하게 한 귀중한 무대였다. 일부 가창에서 양식적 정체성에 대한 과제를 남기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한국 오페라사가 도달한 현재의 성취를 기록하기에 충분한 예술적 수준을 증명해 냈다. 세종의 밤을 수놓았던 그 찬란한 황금빛 상념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묵직한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김준형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에서 SAC’s choice 코너를 3년간 연재했으며, 객석, 피아노 음악,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월간 오디오 등 음악 관련 매체들에 오랫동안 칼럼을 기고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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