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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달의 흑백풍수 칼럼] 형상 너머 진실에 있다. 반풍수(半風水)
사람은 예부터 자신이 머물 곳과 잠들 곳을 가려왔다. 터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오래되었다. 부모님 생전(生前)에는 효자가 드물어도 돌아가신 뒤에는 골골마다 효자라는 말이 있다. 조상의 묏자리를 찾아다니는 자손이 많았다는 뜻이다. 삶에서 멀리하던 풍수가 죽음 앞에서는 다시 등장한다.
반풍수(半風水)라는 말은 왜 생겼을까. 반풍수는 정식 학술용어가 아니다. 한 부분만 알고 그것을 전체의 이치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이 글에서는 반풍수라 부르고자 한다. 어떠한 이론도 부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풍수도 다르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치로 연결되어야 한다.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학문의 깊이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학문의 시작은 하나의 단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외(內外), 시종(始終), 체용(體用), 대대(對待)는 어느 하나만으로 이론이 완성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역시 산과 물을 따로 보는 것이 아니다. 산과 물, 음과 양의 관계 속에서 터의 형세를 살피는 것이다.
산의 모양이 힘 있게 내려온다고 해서 그 형세만으로 자리를 결정할 수는 없다. 산을 보았다면 물을 살펴야 하고, 형세를 보았다면 방위를 살펴야 한다. 이론과 실제가 함께 작용할 때 비로소 풍수의 본뜻에 가까워진다.
터가 길지(吉地)인지 흉지(凶地)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산과 물을 함께 살펴 결격 사유가 없어야 혈처(穴處)를 논할 수 있다. 터의 자격을 먼저 판단해야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다.
평지에서도 한 치가 높으면 산이고, 한 치가 낮으면 물이라 하여 고일촌위산(高一寸爲山), 저일촌위수(低一寸爲水)라 한다. 산과 물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높고 낮음의 형세를 함께 살펴야 터의 지형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땅은 눈으로 보기에 좋아도 생기(生氣)가 모이는지, 살(殺)이 침입하는지를 살피지 못하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터의 중심에서는 24방위(二十四方位)를 살피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살을 피해야 한다. 영생피살(迎生避殺)은 생기를 맞이하고 살을 피한다는 풍수의 기본 이치를 담고 있다.
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인지, 선택을 받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돈이 있다고 길지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빈손으로 길지에 드는 것도 땅의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땅에도 영(靈)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 사람의 마음까지 만들어 내는 날이 온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 우주 공간도 사람이 없다면 그저 공간일 뿐이다. 삶의 공간도 사람이 없다면 다르지 않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반풍수는 풍수를 모르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풍수의 한 부분을 전체의 이치로 착각할 때 생겨난다. 산만 보고 물을 보지 않는 것, 형세만 보고 방위를 살피지 않는 것, 좋은 것만 찾고 나쁜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풍수라 하기 어렵다. 생기(生氣)를 논하면서 살(殺)을 살피지 않는다면 절반의 이치에 머문다.
풍수는 일편(一片)의 안목으로 복을 얻는 기술이 아니다. 산과 물을 보고, 안과 밖을 살피며, 시작과 끝을 함께 헤아리는 데서 그 이치가 완성된다. 부분이 아무리 옳아도 전체가 틀리면 결과는 달라진다.
반풍수(半風水)는 풍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풍수의 한쪽만을 보고 전체라고 믿는 순간, 이미 반풍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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