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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달의 흑백풍수 칼럼] 재벌가의 숙명
재벌가 생가(生家)에는 무언의 법칙이 있는가. 명당이 사람을 택하는 것인지, 사람이 명당에 인연을 두는 것인지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물음이다. 천석꾼, 만석꾼의 집터 또한 우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태어날 때 사진을 찍듯이 부자의 기운을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가를 가보면 누구나 감탄사를 내뱉는다. 종교를 떠나 그곳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생긴다. 같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데, 좋고 나쁨이 존재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물질이 연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음양의 작용이 반복되어야 한다. 호흡을 하듯 계절이 바뀌는 것은 자연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이다. 사람은 생멸의 이치 속에 살아간다. 그 가운데 생하는 이치를 찾고, 순응함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는 본인 스스로 결정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기운의 총체적 형상이다. 삶에 "왜"라고 묻지 않는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작은 부를 허락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때를 기다려 도움을 내어준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얻을 수 있고, 삼대가 공부를 해도 다 배우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문의 깊이를 말함이 아니라, 자연의 신비와 위대함을 말하는 것이다.
재벌가는 조상의 영지인 산소와 삶을 이어가는 가옥 모두가 기운이 응집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자연이 돕는다는 것은 복이 오는 길은 넓히고, 화가 드는 길은 좁혀 삶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재물과 건강을 증대시키고, 그것을 잃지 않도록 지켜준다. 재물이 들어와서 돌아 나가면 채워지질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보편적 삶의 모습이다.
복싱의 타이틀 매치는 승리와 자리를 방어하는 또 하나의 노력이다. 땅을 보존하는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산소나 가옥은 수리하거나 증축을 꺼리며, 가능한 한 원형을 유지하려 한다. 훼손과 수리에 기운의 변화작용이 따름을 알기 때문이다.
이치는 본래 단순하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하고 순수해야 한다. 부귀가 욕심으로 변하고 불평등을 키우면, 집을 보호하던 기운의 경고와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명당터인데 폐허가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때의 부귀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함을 우리는 보고 있다. 영원함은 없어도 길고 짧음은 존재한다. 근본은 자연에 있지만 유효기간은 인간에게 있음을 말한다. 현대에는 재물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당대에 부귀영화를 내려놓는다. 더불어 건강도 함께 약해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았을 때는 자연도 계절을 바꾸어 버린 후에 일이다.
명당의 자격은 어린아이 손에 현금을 쥐어 주는 것과 같다. 부귀와 위험성은 함께 존재한다.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재물은 얻는 것보다 지켜내는 것이 더 어렵다. 갑자기 많은 돈이 들어오면 또 다른 행복의 무게를 감내해야 한다. 그것에 대항하면 건강이 사라진다. 이치란 정확하다. 인간세상처럼 예외를 두는 법은 없다.
미래에 명당은 오늘의 선함 속에 그 희망이 있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말은 이치의 명확성을 보여준다. 돌아서서 나의 선과 덕을 외쳐봐야 이치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름 모를 사연들은 오늘도 흘러 다닌다. 우리의 삶은 조상의 은덕 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면 조상 탓하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오늘의 나는 미래의 조상이 된다. 시간은 연속성이며,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듯 조상과 나, 후손은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집안의 좋은 기운을 영광스럽다 하는 것이다. 손보다 마음이 먼저다. 마음이 밝아지면 생각의 결도 함께 맑아진다. 마침내 '우리'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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